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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책과 감상

[독후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 1

올해 목표 중 하나인 달에 한 권씩 읽기!

1월의 책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윈터 에디션으로 작년 12월에 호다닥 구매하였다.

소-익(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포인트는

 여기서 나오는 철학자들은 모두 에릭 와이너가 조사하고 탐구하고 생각하여 독자에게 소개해준다.

에릭은 은유적이고 철학자에 깊게 빠져들어 살짝 비약적인 면이 있다. 또한 학습적이어서 모든 철학자들의 말을 훈장님 말씀처럼 받아들이려고 한다.

"~처럼"과 같이 소크라테스처럼, 루소처럼..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사실 나는 ~처럼 부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좋은 철학이지만 너무 '그'가 되려는 느낌을 받아서 에릭의 개성이 사라질 듯한... 그런 쓸데없는 걱정도 했다. 읽다 보니 에릭은 이해심이 많고 따뜻한 사람인 것 같다. 에릭의 딸인 소냐와의 일화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에릭의 탐구는 행동으로 나온다. 그 철학자를 알기위해서 기차에 타 철학자가 있었던 곳으로 이동하고 우리에게 철학자의 자잘한 일화까지 알려준다. (난 이런 부분이 너무 좋다.) 해당 철학자의 성격, 행동, 중요한 요점만 알려주니 그 철학자를 잘 이해하게 되고 덩달아서 나까지도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느낌이었다.(하지만 훈계를 듣고 싶지않다ㅠ)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학파'에 푹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시선과 위로를 얻었고 좀 더 긍정적이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삶에서 내가 내린 답과 철학자가 낸 답이 비슷할 때,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철학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철학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은 철학자의 업이다.

이제부터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부분과 함께 읽으면서 적었던 내 생각을 간단하게(아마도) 여기에 남길 것이다. 

 

 


 

우선 마르쿠스부터, 에릭 와이너가 좋아하는 기차가 해당 역으로 진입합니다.

읽으면서 마르쿠스가 나와 비슷함을 느꼈다. 그만큼 친근감이 형성되었다. 물론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크다.

1. "타고난 비관주의를 억누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
2. 마르쿠스는 상반된 두 견해 사이를 오가며 홀로 토론을 벌인다. (...) "그럼 너는 '(침대에 머무는) 좋은 기분'을 느끼려고 태어난 것인가? 여러 가지 일들을 실행하고 경험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3. 골치 아픔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빼앗으라고 제안한다.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1번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2번처럼, 나 또한 내가 태어난 이유를 생각하고 나름 답을 내린 것이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쿠스 또한 같은 시선에 있었다. 나는 가끔 이 사명(내가 내린)을 잊곤 하는 데, 덕분에 마음에 깊게 새길 수 있었다.

3번은 나중에 나올 에픽테토스의 말과 비슷하다. 철학자들을 서로 달라도 비슷한 것 같다.ㅎㅎ

 

다음 역은 소크라테스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했다. 주로 질문을 했지만..

1.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2.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3. 남들의 비웃음은 지혜의 대가다.

좋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는 책에 잘 나와있다.

 

다음 역은 루소 입니다.

나는 지금 잘 걷고 있나? 그는 걸을 때, 걷는 것에 깊게 몰입한다.

1.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사회이다.
2. 걸을 땐 전부 다 잊을 수 있다.
3. "이게 말이 안 돼도 상관없어. 난 그렇게 느끼니까!"

나 또한 걷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빨리 집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걸어간다.

 

다음 역은 소로 입니다.

예술가들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나도 대상의 시선이 느껴질 때, 마음속으로 인사한다. '안녕! 나무야'

1. 의심은 우리를 하나의 확신에서 또 다른 확신으로 옮겨주는 버스다.
2.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3.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4. 소로는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을 때... 가장 잘 볼 수 있음을 알았다.

 편협한 사고를 잠시 내려놓고 살짝 떨어져서 볼 때, 우리는 덜 분노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역은 쇼펜하우어 입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저마다의 세상이 모여 조금 큰 세상이 생긴다. 나와 내 친구들과의 세상, 가족과의 세상 등등

1. 지혜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외국어로 말하는 다른 목소리 듣기.
2.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3.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생각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4.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 책은 자기 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이 챕터는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인데, 내가 밑줄 그은 부분에는 그런 묘사가 없다. 염세적이며 연민을 잘 느끼는 사람으로 난 기억한다.

 

다음 역은 에픽쿠로스 입니다.

그는 소소한 곳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소소하다.

1. "사업과 정치의 감옥을 피해"라고 촉구한다. 정치적 유대가 결국 자족의 가능성을 낮춰 결국 행복을 외부에 위탁하게 만든다
2.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3. 무언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번은 살짝 극성 종교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배제하고 삶의 당연한 부분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다음 역은 시몬 베유 입니다.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면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1.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2. 베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소하다 여길 문제에 크나큰 관심을 기울였다.
3. savlanut는 인내와 관용이라는 뜻이다. (...) 부족한 자신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여유가 생기면 주변에 좀 더 관심을 줄 수 있지 않을 까?라는 변명을 해본다...ㅠㅠ

 

다음 역은 간디 입니다.

나는 간디에게 좀 더 엄격하다. 그는 모순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에서 알려준 부분 중 일부는 조금 배울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 절대로 보상받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서도 안된다.
2. 비폭력은 약자가 아닌 강자의 무기였다.
3. 돈이 있다고 해서 논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군의 폭력에 무응답을 하는 것은 제삼자인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소리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것은 비폭력이 알려져야 들을 수 있다. 간디는 폭력에 명분을 주지 않는 전략을 사용해 영국군의 도덕적 우위를 추락시켰다. 드디어 나는 간디의 비폭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역은 공자 입니다.

참으로 익숙한 사람이면서도 잘 몰랐던 사람이다. 연민을 느끼고 베푸려고 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1. 어진 마음만이 권력과 명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올바른 길이다.
2. 효를 실천하는 것은 오직 효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절이라는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3. 무정함은 잔인한 의도가 아닌 상상력 부족의 결과다.
4. 우리의 타고난 친절함은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 져야 한다. 

상상력 부족,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당황을 할 때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몰라 난처하게 된다. 에릭 또한 그런 상황을 겪었고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우리처럼... 그만큼 친절은 힘든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 역은 세이 쇼나곤 입니다.

일본의 한 궁녀가 쓴 일기? 같은 것이다. 굉장히 직관적이며 단순하지만 쉽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1. 쇼나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상을 묘사한다. 중립적인 관찰은 없다.
2.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느끼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3.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로 크게 좌우된다.

작은 기쁨을 더 계속 느끼려고 하면 이내 그것은 기쁨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쁨이 왔을 때 잘 느끼고 기쁨이 갈 때 잘 보내야 한다. 

+ 나의 세상에는 모나리자와 햄릿은 멋있지 않다. 모나리자를 보았고 햄릿을 읽었지만 경이로움은 느끼지 못하겠다. 누군가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 추종자(학회까지 있을 정도라며)들이 와서 분노하고 멍청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다.   (어쩌라고)

 

거의 다 왔다! 다음 역은 니체 입니다.

니체의 반항적인 면은 즐겁다.

1.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2.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한다.
3.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 다르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4.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

니체는 춤을 춘다고 에릭은 말한다. 니체 또한 춤을 추는 신만을 믿을 것이라고 한다. 나도 춤을 추는 방법을 알고 싶다. 그저 심취하는 것.. 그것이 나는 어렵다.

 

다음 역은 에픽테토스 입니다.

이 부분에서 난 많이 위로받았다. 사실 우리 모두 이 지점(고난)에 머물고 있을 것 같다.

1.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2. 폭군에게 고문하겠다는 위협을 당한다고 해서 반드시 평온함과 고귀함을 잃게 되는 건 아니라
3.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4.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5.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고 증폭시키도록 두지 않는다.

스토아학파의 철학도 알려준다. 이런 사고는 우리를 고난에서 한 발짝 뒤로 가 제삼자로 보게 해 준다. 최선을 다 해라, 그 이후의 결과에는 낙심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준다.

2번을 읽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고 난 어쩐지 위로를 받았다. 트라우마...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폭군 같은 존재이다. 난 이 트라우마가 우리의 안에 머물지 않게 하고 제삼자처럼 보면서 논쟁한다. "난 네가 밉지만 너에게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을 거야"

 

다음 역은 보부아르 입니다.

늙음에 저항했지만 늙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1.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자기 불행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져야 하기 때문이다.
2.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
3.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

이 챕터에서는 늙은이와 젊은 이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조화를 위해서 늙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종착 역은 몽테뉴 입니다.

죽음에 대한 고찰, 죽음과 친구 하기

1. "내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기까지의 과정이다"
2. 커다란 아름다움은 커다란 고통에서 나온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죽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죽음은 모두가 겪는 것이면서 참으로 미지의 세계이다. 그냥 컴퓨터처럼 꺼지는 죽음 일지, 죽음 그 후의 무언가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 점이 너무 매력적이다.

우린 죽음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에릭 와이너의 문체로 나는 철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전반적인 콘셉트도 몰입하기 좋았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방식이고 대화이기 때문에 (어쩌면 지혜?)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
앞으로 나는 계속 생각하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글로 남긴 뒤 철학자들을 읽으려고 한다.

 

****

궁금한 것이 있다.

악당의 철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에게 악당이 저들에게는 영웅이라면...

위의 철학자들이 말한 철학의 일부만 봐서 그들의 삶을 보지 않고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나라 살인범, 성착취 범의 위험한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할 때, 우리는 말을 잃게 된다.(어이가 없어서..)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이 옳은 줄 알 텐데... 이것은 쓸데없는 참견일까?